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유신 (문단 편집) == [[조선]]에 끼친 영향 == 이때부터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정이대장군|쇼군]]에서 [[천황]]으로 바뀌었고 일본이 서구식 외교 관행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한창 서양 열강들과 아편전쟁을 겪으며 차차 개항을 해 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일본과 큰 외교적 마찰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이었다.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조선과 교역을 하고 있던 쓰시마 도주를 통해 메이지 정부의 서계를 받아본 조선 정부는 예전에 조선이 준 도서(圖署)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중국이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쓴 것에 심히 불쾌해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 이에 대해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의 책임자가 독단으로 국서(서계)를 먼저 읽고 양국이 불편한말한 단어 등은 살짝 고쳐서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게 빌미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 책임자가 바보도 아니고 발신자를 바꿔적으며 일부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양국에 확실히 밝혔다.''' 애초에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선 양국의 중계지점일 뿐인 쓰시마섬(対馬)으로선 그런 독단을 똥배짱으로 밀어붙이기는 무리였다. 즉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 측의 독단은 큰 의미가 없었고 문제는 양국의 외교에 대한 태도였다. 외교문서이니만큼 일본 측은 정부가 바뀐 만큼 따라서 바뀌는 관례가 있으면 먼저 조선 측에 알려줬어야 했지만,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고 조선 측도 그나마 서계를 받은 이후라도 일본 측에 제의하던지 해서 합의보면 될 것을 건방지다고 올바르지 않은 관례 운운하면서 일체의 타협도 보지 않아 서로 간의 골이 깊어진 게 문제였다.]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의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되었다. 또 그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청(清)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그 범위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그 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로 양란(洋亂)이 연이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을 필두로 쇄국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또한 서양에 문호개방을 한 일본에게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드러내었다. 조선의 반응에 격분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으나, 1873년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사이고 다카모리]])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메이지 정부는 다시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으나 여전히 1875년 부산에서 열린 회담은 결렬되었다.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일본과의 통상 협정을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결국 무력으로 밖에 외교를 재개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본 내부의 강경파들은 일부 각료들의 동의를 얻어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려우나, 일본의 역사가들은 마치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처럼 해군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본다. 반면에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행간의 맥락을 추정하여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오쿠보 도시미치가 운요호 사건 이전에 해군 대신을 여러번 만났었다 (논의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음)' → 오쿠보가 해군에 운요호 사건을 지시했다,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자 기도 다카요시가 국가에 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이타가키 다이스케]]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수구파 연합이 요구하던 정부 구조 개편을 취소시켰고, 이에 분개한 이타가키가 사직했다' → 기도가 국정 장악을 목표로 운요호 사건을 계획했다 등이 있었다.] 운요호 사건은 정한론 논쟁으로 정한파가 실각한지 2년 만에 벌어졌기에, 운요호 사건 이전에 메이지 정부 내부의 여론은 당연히 정한론에 반대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일본에는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라고 왜곡되어 전해지면서 일본 내에 강경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들도 '''조선 진출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국력을 더 신장시킨 다음에 하자'''라며 일단 조선 출병 자체는 긍정하고 있었기에, 온건파들도 [[씁 어쩔 수 없지]]라는 식으로 운요호 사건을 이용해서 조선을 개항시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후 조일관계는 [[경술국치|돌이킬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